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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3일 목회자 칼럼

  • 관리자

 

1.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유


  “필사의 경주”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육상경기를 할 때 우승을 위해 사력을 다해 뛰는 모습을 표현한 말인데요, 그 말의 유래가 우리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교훈을 줍니다.

 1337년 독일의 뮌헨에서 ‘뒤츠 슈벤블라’라고 하는 한 사나이가 반란죄로 잡히게 되어 4명의 부하와 함께 사형을 선고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참수형에 처하게 되었을 때에 ‘슈벤블라’는 자기의 부하들을 위해서 이렇게 애원을 했습니다.

 "제 목이 절단되는 순간에 제가 떨어진 머리를 들고 부하들이 있는 앞에까지 달려가 볼 테니 제발 저 불쌍한 부하들을 살려 주십시오."

 재판관은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하며 코웃음을 쳤지만, 그의 애원이 하도 간절했던지라 짐짓 그렇게 하도록 약속을 했습니다. 이윽고 망나니의 칼이 슈벤블라의 목을 쳐내린 순간, 그는 자기 머리가 떨어진 것을 알고 두 손으로 자기의 머리를 쳐들고 부하들이 떨고 섰는 앞까지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서 부하 4명은 죽지 않고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필사의 경주’라고 합니다. 모르긴 해도 그 4명의 부하들은 자기가 모시던 이 거룩한 사랑의 소유자에 대해 일생을 살아가며, 남에게 이야기하고 또 자손에게도 이 희생의 이야기를 들려 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희생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요, 위대한 힘을 발휘하는 원동력입니다. 부모님의 희생적인 삶은 자녀를 훌륭하게 성장케 합니다. 순국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나라가 든든히 서 있는 것이구요, 한국 교회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장을 가져온 것도 믿음의 선배들의 순교의 피가 이 땅에 뿌려졌기 때문입니다. 앞서간 선조들의 희생적인 삶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한국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프리카 땅에 복음이 전파된 것도 리빙스턴 선교사와 슈바이처 박사같이, 복음을 위해 불타는 가슴으로 희생적인 삶을 살았던 위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구원받은 성도로서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주님의 십자가 희생이 나의 삶 가운데 메아리치고 있습니까? 주님의 희생의 보혈이 나의 몸 속에 흐르고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살을 갈기갈기 찢으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실로 이 세상에 주님의 희생만큼 아름답고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희생의 명령, 자기 포기의 명령은 훨씬 더 새롭고 깊은 수준에서 일평생 수행되는 전투와도 같습니다. 우리는 부모로서 아이들과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자기가 즐겨 하는 일부 활동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성도에게는 건축 기금 마련에 대한 불평을 중지하고 가계에 부담이 되겠지만 기금 마련에 실제로 동참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모두는 무언가를 포기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아마 그것은 믿음을 위해 무언가를 희생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희생은 그 본질상 우리의 믿음을 더욱 값지게 합니다.

  말씀을 듣고 감화를 받아 “주여,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데에는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고백을 실천하는 데는 어마어마한 비용이 듭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며 살겠습니다”라고 다짐하는 데는 헌신이 요구되지 않지만,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헌신을 넘어선 모든 것을 참는 희생이 요구됩니다.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코’라는 목사님은 창녀와 빈민가의 소망 없는 영혼들의 선교에 앞장서신 분인데, 그분이 어떤 방송 대담에서 하신 이야기가 사랑의 희생을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귀한 도전을 줍니다. 먼저 아나운서가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이들은 몸이 망가지면서 영혼도 망가진 사람들이 아닙니까? 목사님이 그렇게 애를 쓰셔도 새로운 삶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에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물론, 우리가 애써도 새 삶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사랑하는 것 이외에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닮은 희생적인 사랑이야 말로 바로 저와 여러분이 이 땅에 태어난 분명한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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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년 6월 3일 목회자 칼럼
  • 2007-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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